일기: 2019-09-17
세상일이 전부 내 뜻대로 움직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주변에는 내 의지에 반해 일어나는 일이 파다하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는 하지만 자꾸만 천명이 인사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더군다나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아쉬움은 배가 된다. 뭐가 문제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이런 씁쓸한 공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자꾸만 누군가 고삐를 잡아당기는 것 같다. 군것질하려는 어린아이를 붙잡는 부모처럼. 그럴때마다 스스로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사소한 이 떠오른다. 결국 내 선택은 저지당했어야 할 대상에 불과했는가. 이 고뇌는 흔한 후회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내 선택에 망설임은 없었지만, 과연 내가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인간이었는가 하는 운명론적인 물음이다. 노력을 숭상하는 사회이지만 어디까지나 좋은 결과를 얻은 자의 공연한 겸손에 불과하다. 실패를 맞닥뜨리는 사람은 비난에 치이고 후회에 밀려 필연적으로 운명에게 책임을 묻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뭐든지 반복해서 겪으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처음 겪을 땐 실()패였지만, 재차 겪을 땐 득()패이다. 패한 것은 사실이나 얻은 것이 더 많다는 쌀쌀한 자기 합리화가 귀에 속삭이는 말인듯하다.
어찌 되었든 생각만으로는 현실에 아무런 변화를 줄 수 없다. 우수에 젖어있기보단 인생의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나아가고자 한다.
얼마 전 서점에서 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제 한 번 정독하고, 두 번째 읽을 참이다. 니체 사상의 핵심 용어 중 하나로 ‘영원회귀’라는 것이 있다. 인간이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있어서, 수많은 죽음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이란 물리적인 소멸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부활에 가깝다. 이전까지의 나를 지배하던 낡은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마치 다시 태어나듯이 새로운 인간상에 도달한다는 개념이다. 파충류가 탈피하는 순간이라던가 데미안의 아브락사스가 알을 깨고 니오는 장면이 연상되는 부분이었다. 매순간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는 니체의 영원회귀는 참으로 매력적인 사상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나’가 ‘더 나은 나’가 된다는 것 아닌가. 백마디 위로보다 단 한가지 개념이 나를 북돋아주었다.
오늘 역시 기나긴 삶의 굴레에서 무수히 나를 방문할 또 한번의 죽음이자 영원회귀의 파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