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진정으로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시간이 너무나 귀중한 나머지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내겐 이 책을 읽는 시간이 그러했다. 혹여 한 마디라도 놓쳐 얻을 수 있었던 지혜를 잃을까봐 손에 한 움큼 모래알을 쥐듯이 조심스레 꼼꼼히 탐독했다. 그만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이어령 선생만의 시선과 가르침이 빛나는 책이다. 특히 인터뷰 형식이기에 대화하듯이 독자에게 친숙하게 다가온다. 선생과 김지수 기자는 개인, 사회, 삶, 죽음, 기술, 제도, 역사 등 16개의 챕터에 걸쳐 굉장히 다양한 담론을 나눈다.
부끄럽게도, 나는 선생의 글이나 저작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전달하는 독특한 방식에 금세 매료되었다. 추상적인 질문에도 방대한 지식으로 곧바로 구체적인 해석으로 파고든다든지, 학문을 넘나드는 갖가지 비유와 일화로 독저에게 정신적 쾌감을 안겨주는 그의 말하기 방식은 매우 인상깊었다. 선생이 왜 시대의 어른이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수많은 얘깃거리 중 내게 기억에 남는 가르침은 ‘큰 질문을 하지 마라’였다. 지금까지 나는 모든 담론을 하나로 아우르는 해답을 찾고 싶어했다. 개별적 사건 간의 본질적 공통점을 찾으면 언제, 어디든지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허나, 선생은 ‘큰 질문에 대한 답은 다 똑같다’고 말한다. 광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마찬가지로 광의의기에 별 의미가 없이 붕 뜨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생각해보니, 큰 질문부터 던지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다. 구체적이고 자연적인 데서부터라야 특색있는 해석이 나올 수 있다. 물론, 큰 질문을 무조건 던지지 말란 말은 아닐 것이다. 다만, bottom-up 방식으로 사고하여, 광의의 질문으로 가더라도 일반적이고 하나 마나한 얘기를 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글쓰기에 관해서도 깊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한 선생은 글이란 앞선 글의 공허와 상처를 딛고 매번 새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필자만의 지독한 에고가 있어야만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이 나온다고 했다. 동시에, ‘주여, 내가 저들과 똑같은 숫자의 하나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쓰게 해주소서’라는 보들레르의 구절도 소개한다. 이를 모두 읽고, 나는 인간에게 글쓰기란 결국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이자 수단이라는 생각을 했다. 적는 순간부터 고유한 내 것이 되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내면의 생각을 끄집어내기 위해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글쓰는 습관은 기르기 어렵다. 글쓰기란 의식적인 행위로,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선 의지를 가져야 하는데, 습관이란 의식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해야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평생 글을 써야 한다. 살아가려면 꼭 숨을 쉬어야 하듯이, 개인이 (보들레르의 말처럼) 그저 숫자로 남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 ‘존재’하려면 그 개인만의 고유함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숨을 쉬지 않는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죽듯이, 글을 쓰지 않는 인간도 존재론적으로 사망한 것이 다름 없다. 선생의 또다른 말에 따르면, 글쓰기는 ‘관심-관찰-관계’의 세 단계로 이뤄진다. 즉, 나(아)와 세상(타)가 관계를 맺어 ‘아’의 흔적을 ‘타’의 세계에 남기는 것이 바로 글쓰기란 행위의 본질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얻은 깨달음은, 고통과 배움은 하나라는 것이다. 책 전반에 걸쳐 자주 나오는 일화 중 하나가 바로 필록테테스 이야기이다. 트로이 전쟁 후 귀국길에서 부상당한 그리스인 필록테테스는 활과 함께 무인도에 버려졌고, 10년이란 시간 동안 고통을 견디고 홀로 섬에서 살아남았는데, 그 활이 아폴론의 신궁이란 사실을 안 동료들이 활만 다시 훔치러 왔다가 10년 동안 고통을 견딘 필록테테스의 초월적 모습에 탄복하여 그와 활을 함께 모셔갔단 이야기다. 즉, ‘상처’와 ‘활’은 하나라는 것이다. 상처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수많은 시련을, 활은 그 댓가로 얻어지는 배움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흔히 고통은 최대한 덜 겪으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고자 한다. 하지만 필록테테스처럼 10년짜리 상처를 견뎌냈을 때 그 활이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불행한 삶을 산 예술가나 사상가들의 작품이나 사상이 후대에 널리 회자되는 것도, 그들의 삶만큼의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쉬운 길보단 어려운 길을 택하고자 한다. 실패와 시련을 겪어야 배움을 체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되새김질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구절이 여럿 있었다. 맨 처음 말했듯이, 이 책은 지혜를 전달하는 귀중한 책이다. 하지만, ‘지혜는 전달될 수 없다’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나 역시 이어령 선생의 삶과 지혜를 그 무게에 비해서 아주 띠끌만큼만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살면서 때때로 다시 펼쳐볼 만한 책이라고 느꼈다, 그때마다 내가 키워온 지혜의 양을 이 책을 통해 가늠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