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소개서
모든 사람이 죽지만 오직 일부만이 진정으로 살아간다
<브레이브하트> (1995)
삶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니체와 카뮈가 옳다. 세상은 중립적이다. 삶의 의미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후천적으로, 그리고 형이상학적으로 부여한 것이다.
의미 없는 인생은 그저 하루하루의 비루한 생존일 뿐이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계에 내던져졌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끊임없이 스스로 결정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묻는다. 왜 자살하지 않는가?1
나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욕망, 그것이 내 유일한 삶의 이유이다.
나는 내 의지의 피조물이다. 내 삶의 궤적은 내 의지의 자국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의지를 관철하려는 욕망이 있다. 그러나 그 범위와 강도가 다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매우 좁고 제한된 범위에, 그 어디에도 남지 않을 만큼의 얕은 강도로 의지를 투사하고 떠난다. 소수의 영웅은 위대함을 추구하며 그에 걸맞는 궤적을 그리고 떠난다. 그렇게 역사에 이름이 남는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너무나 짧고, 가까이서 보면 충분히 길다. 그러므로 사명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위대해지고 싶다. 위대한 것을 이루고 싶다. 역사에 내 이름을 남기고 싶고, 범인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우러러보는 목표를 성취하고 싶다. 정신적 가치를 최우선에 두는 삶의 자세이다.2
인생은 고통과 권태의 왕복이다3. 나는 기꺼이 권태보단 고통을 택하겠다. 고통은 참을 수 있지만, 권태는 극복할 수 없다.
이것이 내가 왜 자살하지 않는가에 내리는 답이다.
세상에는 평균으로의 중력이 존재한다. 이를 거스른다.
위대함을 이룩하고 내 의지를 광활하고 깊게 관철시키기 위해선 평범함을 배격해야 한다. 세상은 내게 평범해지라 말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관성대로 흘러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서로를 잡아당긴다. 결국 개인으로서의 우리 모두는 집단으로서의 나머지를 향해 이끌린다. 중력에 의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삶은 선형적 궤적을 그린다. 고통과 권태 중 고통이 두려워 권태를 택한 결과이다.
그 중력을 이겨내는 자만이 비범한 것을 이룰 수 있다.
비관성, 비선형의 삶. 이것이 내가 선택한 삶의 형태다.
소수의 탁월한 인간이 모든 탁월한 결과를 만든다. 이들과 뾰족하게 교류한다.
중력은 거스르기란 너무나 어렵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탁월하지 않다. 파레토의 법칙은 현실을 냉혹하리만큼 정확히 설명한다. 아니, 오히려 과소평가한다. 세계의 구조는 20:80도 아닌, 1:99의 법칙이다. 1%의 위대한 사람이 99%의 성취를 이룩한다.
위대함의 조건은 단 하나다. 타협하지 않고, 전심을 다하는 것.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절반을 건 자는 절반이 아니라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전부를 걸지 않은 자에게 위대함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위대함이란 본질적으로 고독하고 차별화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과는 피상적 관계만을 형성하는 것이 낫다. 땅과 가까이 있는 자들과 가까이 할 수록 중력을 벗어나기 더 어려워질 뿐이다. 중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유영하는, 소수의 탁월한 사람과 매우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능한 한 가장 높은 인재 밀도와 가장 적은 구성원의 집단을 경험하라. 세상을 바꿀 영웅과 단둘이 교류하는 것이 가장 좋고, 그 다음은 천재 수 명과 일하는 것이며, 가장 나쁜 것은 수없이 많은 평범한 사람과 같은 조직에 속하는 것이다. 인재 밀도와 조직의 크기는 놀랍도록 반비례한다.
탁월함은 쉽게 알 수 없다.
탁월함이란 지능이나 물질적·사회적 성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당신의 몸 근육 하나하나가 앞으로 뛰쳐나가기 위해 정렬되어 있는가. 한없이 높은 꿈을 꾸며 그 꿈을 실행할 굳건한 의지가 있는 사람인가.
이 사람은 인생의 주요 순간마다 어떤 가치관을 갖고 어떠한 결정을 내렸는가, 이 사람은 타협하지 않는가, 왜 사는가? 와 같은 보이지 않는 요소이다.
믿을 것은 오직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다. 말이나 비전이 아니다. 나의 삶의 궤적이 나를 외친다.
위대함을 이루려면 정렬과 확신이 필요하다.
어떻게 위대함을 이루어야 하는가? 위대함으로의 벡터는 방향과 크기를 갖는다. 방향은 정렬이고, 크기는 확신이다.
정렬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이다. 좌표 상 n번의 무작위한 걸음은 종심에서 $\sqrt{n}$ 만큼만 가지만, 한 방향으로 간다면 $n$ 에 비례해 갈 수 있다. 4 반드시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 어디까진 앎의 영역으로 선을 긋고, 어디까진 불확실한 영역으로 어렴풋이 놔둬야 하는지를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리하여, 정렬은 또한 균형이고 합이다. 나라는 사람과 내가 선택한 위치의 합이다. 자신감을 잃지 않고 전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가피하게 실패했을 때에는 교훈을 얻되 나를 용서하는 것도 중요하다. 5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모든 근육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정렬되어 있는가?
확신은 내가 정한 방향으로 가는 강도이다. 인생에 기회는 여러 번 오지도 않을 뿐더러, 모두가 그 기회에 뛰어들 수 있지도 않다. 우선 그 기회가 천재일우의 기회임을 식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며, 마침내 그 기회에 전부를 걸 배짱이 있어야 한다. 확신은 가만히 있는다고 생기지 않는다. 내가 머리로 '확신을 가져야지' 생각한다고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확신은 오롯이 몸 전체에 아로새겨질 만큼 강렬하고 체화되는 경험으로만 생긴다. 그래서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 확신은 인간을 행동하게 만든다. 성취는 행동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똑똑하고 노력하는 건 당연하다. 세상엔 그런 사람 많다. 방향에 대해서도 대충 감을 잡는 사람들은 꽤 있다. 그런데도 소수만 위대함을 성취하는 건 확신의 차이다.
정렬과 확신은 서로 영향을 준다. 확신 속에서 정렬이 생기고, 정렬된 나는 확신을 더욱 강화한다.
결국 위대함은 발견한 답이 아니라 부여한 답이다.
근거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선택이 온전히 내 것인 이유다. 나는 그것에 전부를 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증거가 아니라 아직 지불하지 않은 약속이며, 판단은 내 삶의 궤적이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