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009 - 02.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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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에게는 포스가 강하다."
— 다스 베이더,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

최초 작성: 2026-08-01
최종 수정: 2026-08-01

초등학교 4학년 교실이었다. 선생님이 물었다. 알루미늄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는 사람. 나는 손을 들고 보크사이트라고 답했다.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알고 있었다. 친구들이 와, 하고 웃었다. 쟤는 저런 걸 어떻게 아냐고. 기분이 좋았다. 그때는 그게 전부였다. 누가 시켜서 안 것도 아니었고, 시험에 나올까 봐 외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궁금했고, 알았고, 인정받았다.

그게 초등학교 6년 동안 항상 나의 정체성이었다. 똑똑한 애. 수학 잘하는 애. 초등학교가 어떤 시절인가. 영유아기 내내 보호받았던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학교라는 첫 사회화의 발걸음을 떼는 시기이다. 친구를 만나고, 사귀고, 영향을 받고, 꿈을 키우는 시기이다.

우리는 강남 대치동에 살았다.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전국의 수재와 교육열이 몰리는 곳. 그때는 그곳이 특별한 동네라는 생각이 없었다. 그냥 내가 사는 곳이었다. 부모님은 전라북도 출신이었고, 일산으로 옮겼다가, 서울 관악구로, 그리고 내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강남에 자리를 잡았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들은 얘기로는, 그 이사가 금전적으로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금 이사하지 않으면 나중에 아이에게 미안할 것 같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결심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출퇴근 시간과 가족의 주머니 사정을 빠듯하게 하면서까지 내린 결정이었다고. 그때 나는 그 무게를 몰랐다.

내가 처음으로 가진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4년 동안 피아노를 배웠으니 그게 내 전부였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변호사라는 좀 더 현실적인 꿈으로 바뀌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변호사가 뭐하는 직업인지도 몰랐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생긴 최초의 진지한 꿈은 과학자였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과학자를 꿈꿨다.

그 무렵 나는 화학을 더 좋아했다. 주기율표를 달달 외웠고 온갖 화학 책을 탐독했다. 그러다 멀어졌다. Covalent bonding을 배울 때쯤이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여야 했다. 반면 수학은 모든 것이 유도됐다. 공리에서 시작해서 끝까지 설명이 됐다. 나는 그쪽이 더 좋았다.

초등학교 3학년에 초등 과정 수학을 끝냈다. 4학년에 중등 과정을, 5학년에 고등 과정을 마쳤다. 6학년에는 한국수학경시대회(KMO; Korean Mathematics Olympiad) 준비를 시작했다. 이 속도에 대해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냥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뿐이었다. 대치동에서 수학 깨나 한다는 애들 사이에선 그렇게 유별난 속도도 아니었다. 내 환경이 자연스레 내 목표를 세웠다.

부모님은 학원에 가라고 한 적이 없었다. 다니는 것도 그만두는 것도 내 몫이었다. 그렇다고 그게 완전히 혼자만의 것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학교에서 수학 잘하는 아이로 알려졌고, 학원에서도 인정받았다. 좋아서 했고, 잘해서 좋았고, 좋아서 더 했다. 그 안에 타인의 시선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 다니던 학원들은 하나같이 체벌을 했다. 손바닥이 마를 새가 없었다. 2010년대 초반, 그때만 해도 그랬다. 주어진 문제를 다 풀어야 집에 갈 수 있는 곳도 있었다. 그렇지만 트라우마로 남아있진 않다. 오히려 그 긴장이 나를 더 밀어붙였던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학원에서도 나는 실력이 좋아 덜 맞는 학생이었다.

수학과 과학을 계속하고 과학자를 어렴풋이 꿈꾸다 보니, 어느 순간 과학고가 목표가 되어 있었다. 과학고생들이 쓴 책을 읽으며 동기부여를 받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학문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고등학교라니, 꿈 같았다. 우리나라에서 수학과 과학을 제일 잘하는 아이들이 가는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고 싶었다. 이게 내가 스스로 세운 목적지였는지, 아니면 그냥 그 길 위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놓인 표지판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강요당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온전히 내가 골라잡은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의지와 환경의 흐름, 그 사이 어딘가일 것이다.

그래서 KMO는 더욱 중요했다. 상을 받는 게 과학고 합격을 보장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매우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자연스레 경시 준비가 내 인생의 전부가 됐다.

초등학교 생활은 무난하게 지나갔다. 남들 다 일으키는 큰 말썽도 일으킨 적 없고, 학교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방과후와 방학 중엔 당연하다는 듯이 학원을 갔고, 운동이나 예술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초등학교 고학년 때 전부 그만뒀다.) 특히 KMO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6학년 때는 학교보다 학원에 더 큰 비중과 노력을 쏟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졸업 11년 뒤인 스물셋에 동창회를 작게 했다. 다들 겉모습이 성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딱 하나, 목소리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1분만 얘기해도 그때 각자와의 추억, 이야기, 성격, 친구 관계가 전부 기억났다. 신기한 건, 모두가 그때 그 인격에서 거의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도, 내 본성은 이미 초등학교 때 완성됐을지도 모른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안 돼 첫 수학 퀴즈를 봤다. 한 문제를 경시대회에서나 쓰는 심화된 방식으로 풀었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혹시 KMO를 하냐고 물었다. 그 질문 안에는 이미 어떤 인정이 들어 있었다. 그 순간에도 기분이 좋았다. 지식을 좇는 것과 남에게 인정받는 것, 그 둘이 여기서 가장 뾰족하게 만났다. 이 시기의 나를 정의한 그 두 가지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둘은 산산조각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