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015 - 12.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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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의 최악의 날이면 충분하다."
— 조커, 다크 나이트

최초 작성: 2026-08-01
최종 수정: 2026-08-01

스무 문제였다. 4점짜리 네 개, 6점짜리 네 개, 5점짜리 열두 개. 그 해 1차 동상 컷은 52점이었고, 그걸 넘어야 연말에 열리는 2차 시험에 갈 수 있었다. KMO 얘기다. 내 유년 시절 2년여를 바친 그 시험이다.

1차 시험은 2015년 5월 어느날, 서울대 자연과학대 건물에서 봤다. 끝나고 M학원에 가서 선생님들과 답을 맞췄다. 두 문제를 틀린 걸 그 자리에서 알았다. 둘 다 5점짜리였다. 하나는 지름을 구해야 하는데 반지름을 구했다. 다른 하나는 삼각치환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게 어려운 문제였다. 하필 그 전날 삼각치환을 공부해뒀고, 풀이도 맞게 세웠는데, 계산을 틀렸다. 10점이 날아갔다. 42점. 모르는 걸 틀린 게 아니라, 맞힐 수 있었던 걸 틀린 거였다.

가채점이라 점수가 그날 확정되지는 않았다. 확정될 필요도 없었다. 42점으로는 안 됐다. 전년도 커트라인을 봐도 가망이 없었다. 장려상. 2차는 없었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는 화를 냈다. 나는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만 열세 살이었다. 그때까지 한 가지를 그렇게 오래 준비해본 적이 없었다. 1년 넘게 준비한 것이 하루 만에 끝났다.

거기까지 오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초등학교 내내 선행학습을 열심히 하며 고등학교 수학을 5학년 때 끝냈다. 6학년 때부터 KMO 준비를 시작했고, 세 달쯤 뒤인 5월에 시험 삼아 한 번 봤다. 백 점 만점에 10점을 받았다. 어려운 시험이구나 싶었고,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학을 좋아했다. 이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수식과 기호가 좋았고, 그 순수함이 좋았고, 세상을 설명하는 힘이 좋았다. 과학도 좋아했다. 주기율표를 외웠고, 물리를 읽었다. 무언가를 알아가는 것 자체가 재밌었다. 그 무렵 나를 움직인 건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학기 중에는 학교가 4시나 5시에 끝났고, 학원 수업은 5시 반에 시작해서 10시에 끝났다. 법으로 학원은 10시까지만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집에 보내지는 않았다. 학원에서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서 운영하는 독서실이라는 게 있었다. 명목상 자습이지만 선생님들이 돌아다니며 질문을 받았다. 12시까지는 무조건 했고, 원하면 1시, 2시까지도 할 수 있었다. 2시까지 한 적은 많지 않았지만 1시까지는 거의 매일 했다. 시험이 가까워지면 불안해서라도 그랬다.

다른 학원은 거의 다니지 않았다. M학원만 다녔다. 영어 학원도 안 다녔다. 그때 나는 영어를 싫어했다. 엄마한테 영어는 절대 안 배우겠다고 했다. 나중에 미국으로 대학을 오게 된다는 걸 그때의 나에게 알려줬다면 절대 안 믿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랬다.

수학을 좋아했다는 말과, 그 1년이 나를 지치게 했다는 말은 같이 있을 수 있다. 좋아하는 것과, 그것을 좋아하기 위해 매일 새벽 1시까지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은 같지 않았다. 대치동은 수학을 KMO라는 하나의 통로로 밀어 넣었고, 그 통로를 1년 넘게 지나는 동안 무언가가 변했다. 사랑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사랑이 담긴 그릇이 사랑을 조금씩 망가뜨렸다.

그래서 그날을 하나의 나쁜 날이라고 부르는 건, 절반만 맞는 말이다.

막판에 나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지금 돌아봐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때도 알고 있었다. K반이라는 게 있었다. 정규반과 별개로 운영하는 문제풀이반인데, 가장 높은 K1반부터 가장 낮은 K5반까지 다섯 개 계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상위 20퍼센트에 들면 위 계층으로 올라가고, 반대로 하위 20퍼센트면 강등당했다. 살벌했다. 나는 K4반쯤에 있었다. 위로 못 올라가고, 아래로 안 내려가고. 더 했으면 한 계층쯤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맨 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무렵 내가 진짜 잘한다고 인정했던 애들은 나중에 서울과학고에 갔다.

나는 K반을 드롭했다. 집에서 혼자 공부하겠다고 했다. 집에서는 공부하지 않았다. 강등당하는 시스템을 못 견뎠는지, 그냥 지쳤는지, 천장을 먼저 알아챘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때 나는 그걸 그냥 지겨움이라고 불렀다. 아마 그게 제일 견디기 쉬운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42점은 손가락이 미끄러진 결과이기도 했고, 이미 몇 달 전부터 손을 놓고 있던 결과이기도 했다. 둘 다 사실이다. 나는 오랫동안 앞쪽 이야기를 붙들고 있었다. 지름과 반지름, 삼각치환, 전날 밤의 공부. 그 디테일을 아직도 정확히 기억한다는 건, 그 이야기가 내게 필요했다는 뜻일 것이다. 실력은 있었는데 운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자존심을 지켜주니까.

그 다음 몇 달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장 바뀌는 건 없었다. 목표는 여전히 과학고였고, 중2 때 한 번 더 KMO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M학원은 계속 다녔다. 다만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 중 동상 이상을 받은 애들은 2차를 준비하러 다른 반으로 떠났고, 내가 남은 반에는 한 살 어린 애들이 들어왔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무엇보다 안에서 불꽃이 확실하게 꺼진 느낌이었다. 5월부터 가을까지, 나는 멍하니 다녔다.

대신 서점에 많이 갔다. 강남 교보문고, 광화문 교보문고. 매대 앞에 서서 잡다한 책을 읽었다. 그러다 『자본주의』라는 책을 읽었다. EBS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한 책이었다. 거기서 경제에 처음 흥미를 느꼈다. 그전까지 내 세계는 수식과 기호와 문제풀이였는데, 경제는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원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하는 아이였다. 돈과 자본주의가 세상을 읽는 하나의 렌즈처럼 느껴졌다.

경제 책을 몇 권 읽다가, 『Why I Left Goldman Sachs』를 발견했다.

그레그 스미스라는 전 골드만삭스 트레이더가 쓴 책이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세일즈 앤 트레이딩(S&T) 부서에서 일했고, 스탠퍼드를 나와 인턴을 거쳐 정직원이 됐고, 뉴욕에 있다가 런던으로 옮겼다가, 2007년에 회사를 나가서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을 책으로 냈다. 골드만의 문화가 얼마나 탁해졌는지를 폭로하는 책이었다. 1999년 상장 이후 도덕적이고 고객 중심이던 문화가, 고객을 기만하고 단기 이익만 좇는 쪽으로 변했다고

나는 골드만삭스가 뭔지도 몰랐다. S&T가 뭔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읽었다. 책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는 저자가 스탠퍼드에서 리크루팅을 거쳐 입사하고, 멘토를 만나고, 여러 데스크를 돌며 배우는 이야기다. 톤이 담담하고, 초기 직장 생활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그린다. 후반부는 팀을 옮기고 런던으로 가면서 문화가 탁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폭로다.

이상한 건, 나는 후반부가 아니라 전반부에 끌렸다는 것이다. 책이 전하려는 핵심은 폭로, 즉 후반부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에게 직장 문화가 탁하다느니 고객을 기만한다느니 하는 얘기가 와닿을 리 없었다. 내게 와닿은 건 전반부였다. 리크루팅을 하고, 입사해서 훈련을 받고, 데스크에서 어떤 고객을 상대하며 무엇을 배우는지. 저자는 금융시장을 통해 세상을 읽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그때 내가 원하던 것을 정확히 건드렸다. 수학과 순수과학에 지쳐 있던 나에게, 세상을 아는 것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준 셈이었다. 높은 해상도로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말은 훨씬 나중에 어디선가 듣고 가져온 표현이지만, 그때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세상의 구석구석을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자본시장과 투자은행은 그 목표에 정확히 맞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금융을 하고 싶었다. 그게 전부였다.

M학원을 그만두기로 한 건 그 즈음이었다.

11월 어느 날, 엄마와 여동생과 예술의전당에 갔다. 스티브 잡스 사진전을 보고 있었다. 학원을 그만두겠다는 건 며칠 전에 이미 결심했고, 마음속으로는 훨씬 전부터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전날 엄마한테 말했고, 엄마가 다음 날 학원에 전화하기로 했다. 그래서 사진을 보는 도중에 엄마가 M학원에 전화를 걸어 그만두겠다고 했다. 학원에서는 마지막으로 한 번 와서 상담을 받아보라고 했다. 엄마가 그 말을 전해줬다. 나에게는 그게 불필요한 영업처럼 들렸다. 마음은 이미 떠 있었다. 됐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미 한번 결심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필 스티브 잡스 사진전이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게 남는다. 마치 훨씬 나중에 창업으로 뛰어들 나를 암시하듯.

과학고를 안 가겠다고 말한 건 그보다 조금 뒤였다.

2015년 연말 어느 날, 엄마와 양재천을 걷기로 했다. 그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자주 하는 엄마와의 소소한 루틴이다. 아파트 놀이터를 지나면서, 용기를 내서 말했다. 엄마, 나 과학고 안 갈래. 엄마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그래, 라고 했다.

그렇게 초등학교와 중학교 1학년 내내, 내가 처음으로 제대로 키운 인생의 목표를 완전히 버렸다.

2015년은 내 운명이 송두리째 바뀐 해였다. 만약 이 해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과는 매우 다른 삶을, 매우 다른 곳에서 살았으리라는 생각을 아직도 종종 한다.

가끔 생각한다. 그때 막판까지 최선을 다했다면, K반을 드롭하지 않고 공부하는 척을 하지 않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모르겠다. 달라졌을 거라고도,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도 말하고 싶지 않다.

그날이 내 인생을 바꿔놓은 건 사실이다. 그 시기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미국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더 나은 방향이었는지, 더 나쁜 방향이었는지는 모른다. 인생은 한 번뿐이라서 다른 쪽 길이 어땠을지 알 수 없고, 죽은 뒤에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사실만 적어두려 한다. 열세 살의 내가 수학을 놓고 금융을 택했다는 것. 그때의 나에게는 그게 내가 가진 갈증에 대한 가장 맞는 답이었다는 것. 갈증은 늘 바뀌는 것이고 그 뒤로 실제로 많이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그때의 답이 틀린 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거면 됐다.

바야흐로 새로운 10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