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026 - 07.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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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선택이란다"
— 알버스 덤블도어,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최초 작성: 2026-08-06
최종 수정: 2026-08-07

8월 6일 목요일. 저녁 7시 38분. Palo Alto Downtown에 위치한 루프탑 바, President's Terrace. 혼자 자리에 앉았다. 귓속 에어팟에서는 이미 1시간째 White Panda의 Midnight Life가 나오고 있었다. 서버가 메뉴판을 가져다줬다.

눈으로 훑어 내려가다 보니 Cruel Summer라는 칵테일이 눈에 들어왔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번 여름이야말로 참 잔인했지. 고민 없이 그걸 주문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지난 2개월을 회상해본다.

큰 기대 없이 도착한 뉴욕. 숨 막혔지만 뱅커가 된 기분을 나름 느꼈던 일주일간의 트레이닝. Menlo Park에 도착하고, 에어비앤비 방에 들어가고, 몇 번 와 봤던 그 오피스에 매일 걸어 들어가고, 둘째 주인가 아침 6시 반까지의 밤샘. 오피스 사람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라는 피드백을 받았던 mid-cycle review. 일을 하기보단 상사의 피드백을 기다리던 공허한 시간들. 노트북 앞에 앉아 사색하거나, 글을 읽거나, VS Code에 단상을 적어 내려가던 순간. 밤까지 오피스에 남아 있던, 몇 번은 일 때문에, 몇 번은 그냥 센치해졌던 많은 순간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마지막 2주. wine outing, SF 오피스 방문, 옛 친구들과의 재회. YC 배치메이트들은 연락을 받지 않았다. 중간에 ICML도 갔다 왔지. SF와 팔로알토를 왔다 갔다 했던 순간들.

Cruel Summer
Cruel Summer

눈을 떠보니 Cruel Summer와 브리 치즈 크래커가 나와 있었다. 칵테일은 생각보다 맛없었다. 하긴, 잔인한 여름이 즐거웠다면 그것도 이상할 테지.

장면들은 선명한데, 정작 무엇을 느꼈는지가 잘 잡히지 않는다. 다시 눈을 감고 느낌에 집중해봤다.

나 두 달 동안 뭐했지?

시작하기 직전 느꼈던 감정은 무덤덤함이었다. 이 일에 기대조차 없이, 빨리 이 여름이 지나가기를. 부디 무난하기를. 왜? 이미 뱅킹에 마음이 떴으니까. 왜?

부분적으로는, 리크루팅을 하기도 전에 이미 이 인더스트리에 있는 사람들이 주니어 시니어 할 것 없이 이 일을 즐기지도, 보람을 느끼지도 않는다는 걸 발견하면서. 아니, 어쩌면 그 전에 BCG 때, 미래에셋 때, 그리고 에이스 때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그 세 곳에서 나는 내가 일하는 미래를 그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건 하이퍼노트였다.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 회사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 기분. 내가 하고 있는 직무, 세일즈에 대한 혐오.

그래, 어차피 에버코어는 그때 버릴 것이었다. 휴학하고 하이퍼노트를 풀타임으로 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뱅커로서의 나는 적어도 내 마음속에선 영원히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극적으로 휴학을 취소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지만, 뱅킹으로 돌아갈 생각은 내 생일날 SF 공항에서 이륙하던 그 순간, 그 모든 상념과 걱정에 밀려 그곳에 두고 와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왔을까.

관성이다. 굳이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한때 정말 원했던 것, 가졌을 때 너무나 기뻤던 것. 1년 반이 지났고,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해보고는 싶었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해봐야 미련 없이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인턴십은 그저 하나의 단기 직업 체험이 아니라, 내 10년의 마침표였으니까. 정점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젠 너무나 변해버린 나에게, 뒤로 돌아봐야 보이는 한 시대의 잔재이자 디디고 올라가야 할 흔적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냥 하기로 했다. 할 이유는 없어졌지만, 안 할 이유도 없어서. 그래도 해보고 끝냈다고 미래의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내일이면 리턴 오퍼가 나온다. 나오든 나오지 않든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이걸 알고 있다는 게 조금 이상하다. 10년을 이 문 하나 열려고 보냈는데, 문이 열리는지 여부가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감흥이 없다.

지난 10년이 생각난다. 어디서부터 시작했지? Why I Left Goldman Sachs부터. 떠나는 이야기를 읽고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미국을 꿈꿨다. 금융인이 되는 상상을 했다. 세상의 중심에 설 것만 같았다. 돈의 흐름이 세상을 이해하는 돋보기인 줄 알았다.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뱅킹을 한다고 돈의 흐름이 보이나?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되나?)

그래서 와튼에 오고 싶었다. 그래서 민사고를 갔다. 그래서 경제를 열심히 했다. 그래서 와튼에 들어가자마자 온 신경을 리크루팅에 최적화했다. 클럽 인터뷰와 케이스 스터디를 준비하던 나날들. 겨울방학에 학교에 남아 테크니컬을 준비하던 시절들. 대부분의 친구 관계를 finance hardo들로 채웠던 시절들.

전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후회하나? 허무한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다. 마치 이별하고 나니 왜 사귀었을까 후회되는 전 연인이랄까. 그렇지만 그 사람을 만났던 것도 나고,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 인생이란 과거의 후회와 상념을 등에 지고도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진심을 다했다면, 회한이 있을지언정 굳은 마음과 결기로 미련 없이 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지난 10년을 버리는 결정.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 초보자로 새로이 시작하는 결정. 정말 힘들고 어렵고 또 아프겠지만, 그래도 맞는 길이라는 결의를 가지고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이다. 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나라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한 시대의 종말이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타종이다. 이제부터 변명은 있을 수 없다. 한 번 결심한 바, 뒤돌아보기란 없다. 전심을 다해, 목숨을 걸고, 내가 정렬한 이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야 한다.

잔인한 여름이었다. 지난 10년의 목표가 그 10년을 이제 부정한다.

Sunset in Palo Alto
Sunset in Palo Alto

글을 마무리하니 8시 53분이다. 해가 거의 다 졌다. Bay Area 서쪽 지평선, 언덕 너머로 불그스름한 해 질 녘만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래, 붉은 여름이었다. 아주 샛노랗게 빛났고, 이젠 어둑하게 가라앉을, 그런 여름이었다.


[08/07/2026 업데이트]

다음날 나는 결국 리턴 오퍼를 받지 못했다. mid-cycle review 때 주었던 피드백, 결국 사람들과 친해지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고 MG는 말했다. 질문 있냐는 말에 없다고 대답했다. 대화는 1분 만에 끝났다.

MG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나를 많이 응원했다고 했다. 동시에 내가 별로 이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아 보인다고도 했다. 하긴, 2개월이나 있었는데 그게 안 느껴졌으면 이상한 거지. 내가 뱅킹을 하기에 너무 똑똑한 것 같다고도 했다. 한편으론 동의했지만, 한편으론 '과연 이 사람이 나의 무엇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할까' 궁금했다.

기분이 아예 아무렇지도 않진 않았다. 문득, 1학년 2학기 때 frat rush가 생각났다. 그때도 집단에서 거절당했었다. 사람으로부터 거절당하는 건, 갈수록 익숙해지지만 여전히 씁쓸하다. 설령 그게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라도.

공항으로 향하는 우버에 탔다. 작년 이맘때도 심란하게 이 도시를 떠났었다. 그때는 시련과 고뇌를, 이번엔 씁쓸한 뒷맛을 안고. 두 번 다, 등을 보인 건 나였다.